이민호 작가론  "뜻밖의 방문"

                                                                                                                     김노암(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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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자체가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모호함' 이 지배하는 장소이다. 익숙한 듯 현실에 널려 있는 사물들과 폐쇄된 공간으로부터 벗어나 출구를 향해 나아가며 외부와의 소통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짓으로 그 모호함 속을 헤매고 있는 모습을 실타래로 표현하였다.(작가노트)”

 

거대한 실뭉치가 낯선 표정으로 우리의 거실과 방문을 훔쳐보고 있다. 실뭉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다는 표현은 다소 과장될지 모르지만 분명 작가가 느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침입하고 있다. 마음의 한 귀퉁이를 슬쩍 비껴 들어오다 작가의 눈과 마주친다. 거대한 실뭉치는 사실 실뭉치를 닮은 다른 존재일지도 모른다. 결코 실뭉치가 아닌 그러나 실뭉치를 빼닮은 이 기이한 존재는 왜 우리의 현실을 기웃거릴까?

 

풀어지지 않은 실뭉치는 우리의 기억을 닮았다. 우리는 살아온 순간들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왜곡되고 뒤엉킨다. 기억은 거대한 실뭉치 덩어리로 나타난다. 하늘에 떠있거나 바다를 횡단하는 남극 빙하처럼 흐른다. 하나하나 실타래를 풀지 않는다면 무엇이 원인이었고 무엇이 결과였는지 불분명하다. 나와 너의 관계 또한 뒤바뀌기 일쑤다. 어떤 기억이 마치 섬광처럼 떠오를 때가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정확하고 의미있는 기억인지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그 선명한 감각을 느낄 뿐이다.

 

작가는 텅빈 채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이제는 퇴락한 한국의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방직산업의 현장에서 기이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거대한 실뭉치가 작가를 엿본다. 실뭉치는 닫힌 우리의 내면의 문을 살짝 열고 들어온다. 실뭉치는 인간 내면에 자리한 타고난 노동과 모성(母性)을 은유할지도 모른다. 방직공장의 소녀들, 어머니 또는 할머니의 지친 노동에도 가족을 위해 밤늦게까지 노동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거대한 초현실적 실뭉치는 낯설지만 깊은 유대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이타적 사랑일지도 모른다. 불안과 설움을 위로해주는 온기(溫氣)를 준다.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사라진 텅빈 공간에 갑자기 출현한 실뭉치는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의미를 생성하고 넓게 퍼져 세상의 의미망을 만들기도 한다. 실타래가 흩어졌다 뭉치기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관계와 의미와 세계가 형성되고 분해되길 반복한다. 하나의 현실과 다수의 현실들이 서로를 기웃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다차원의 세계 속에서 차원과 차원의 미로에 갇혀 있는 존재에게 탈출을 위한 구명줄이 잠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미궁에 돌입해야 하는 테세우스를 위해 아리아네드가 건넨 실뭉치는 미궁에 빠진 연인을 살리는 구명줄이다. 테세우스는 영웅이지만 영웅에 버금가는 조력자의 도움 없이는 영웅은 언제나 실패할 수 있다. 미로와 같이 얽힌 채 갇힌 세계에서 저 실뭉치는 다른 현실로 우리를 인도한다. 실뭉치는 지면에 달라붙은 채 굴러가고 하늘 구름은 흘러간다.

 

2

 “도심 속에 반듯반듯하게 인공적으로 조성된 정원 또는 공원에서 느껴지는 나무나 잔디의 푸르름이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꼭 나만의 판단은 아닐 것이다. 이미 규격화 되어있는 이러한 풍경들의 이미지화가 나의 작업이다. 점차 개인화 되어가는 이 시대 속에서 갈수록 첨단화 되어가는 개인용 기기들…이러한 여건들에 맞춰진 휴대를 할 수 있는 풍경은 어떤 것이 될까...(작가노트)”

 

이민호 작가에게 풍경은 자연이 아니라 도시의 얼굴이고 표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고 생로병사할 우리의 운명은 도시와 떼어놓을 수 없다. 더 이상 도시와 자연 상대개념이 아니다. 도시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도시이다. 우리는 도시의 생애를 살아간다. 작가에게 풍경이란 도시민의 풍경일 수밖에 없다. 산업문명이 배출하는 연기는 도시민의 입김이다. 우리는 공장과 건물처럼 숨을 쉰다. 작가의 사진 이미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초현실적 생활을 은근히 빗대어 재현하고 있다. 도시문명이 지친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도돌이표처럼 다시 도시문명이다. 회색과 우울로 은유되는 산업화시대의 유물과 도시의 얼굴이 작품에 녹아 있다. 개인 미디어와 뒤엉킨 산업화 시대의 풍경이 여러 시간대의 도시 풍경을 꼴라쥬한다. 도시가 곧 숲이고 산이고 언덕이 된다.

 

서류가방 속에 공장이 연기를 뿜어내고 풀이 자라고 새가 난다. 침대 위에 놓인 여행가방과 바닷가에 놓인 서류가방이 오버랩된다. 박찬욱의 영화 <올드보이> 속 주인공이 갇혔던 바로 그 가방처럼 우리는 가방 안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킨다. 도시와 산업과 문명이 모두 가방 속에 있다. 가방은 무언가를 담는 물건이다. 작가는 사물이 아닌 다양한 이미지를 담았다. 20세기 초 초현실주의자들이 오브제로 활용했던 바로 그 서류가방들과 연결된다. 가방과 신발과 모자는 초현실주의자들이 반복해서 애호한 물건이다. 무언가를 채워 넣은 가방과 덜어낸 빈 가방은 상징적이다. 모두가 떠나버린 빈 공장에 문득 거대한 실뭉치가 방문했듯 빈 가방 속에는 다양한 이미지 다양한 인상이 채워진다. 빈 가방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마술적인 오브제이기도 하다. 심지어 우리의 존재마저. 인간이 부재하는 공간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존재성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작가의 작품에는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마주하는 사물과 이미지와 풍경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어떤 기승전결의 서사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깊은 인상을 준다. 마치 롤랑 바르트가 이야기했던 푼크툼처럼 날카롭게 우리의 눈에 꽂히는 이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