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자신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정현 (미술비평)

 

 

  « 저는 제 자신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어요. 기억은 저로부터 오지 않았습니다. »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 그린비, 2009, 91쪽

 

  «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고, 나를 이해시키고 싶고, 알리고 싶고, 포옹 받게 하고 싶고, 누군가가 와서 나를 데려가기를 바란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동문선, 2004(1977), 95쪽

 

우리는 창작이 삶에서 길어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삶은 계획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불가항력의 장이다. 예술적 창작이란 단순히 이미지를 생산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 어떤 성찰을 감행하려는 의지의 순간이자 본질적인 고민의 시간이니 말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이란 감정을 이미지를 들춰낼 뿐 반사작용(reflectivity)에 다다르기는 어렵다고 설명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을 통해 성찰하고 싶지만 늘 실패하는 사람이란 의미처럼 들린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기억을 표상하는 이미지를 모아놓은 사람이다. 바르트가 사진을 관찰하는 방식도 사랑의 방식과 유사하다. 작가가 주목하는 주제가 화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나, 결국 우리가 관심을 보이는 대상은 중심 주변에 우연히 포착된 무엇이다. 이처럼 중심 주변을 배회하다가 전혀 상관없는 대상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 삶이 아닐까? 이처럼 이민호의 사진은 그녀가 배회하는 주변에서 생성된다. 그녀에게 사진은 자신의 삶의 배경이자 모든 창작을 위한 요소이자 그것은 작가가 있던 그곳, 그녀가 본 풍경의 기록이자 ‘기억의 표상’이 된다. 이렇게 차곡차곡 쌓인 기억의 원소들은 다시 사진 화면 위에 재배치되어 또 다른 새로운 세계로 펼쳐진다. 그녀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개념인 « 휴대풍경(portable landscape) »은 일화적인 기억의 단편들을 모은 이미지가 아니라 작가가 사는 일상의 장면부터 여행 중 우연히 발견한 장소들의 이미지를 뒤섞어 일상과 일탈이 교차하도록 재배치한 가상적 풍경이다.

 

사진으로의 탈영토화

사실 이민호는 한국에서는 사진작가로 알려졌지만 파리 유학 시절에는 화가로서의 활동이 더 두드러졌다. 그녀의 회화는 지금의 사진과 달리 무채색 계열의 어둡고 다소 무거운 분위기의 작업이었다. 1990년대 말 회화에서 사진으로 매체를 바꾸고 작업의 분위기도 상당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회화 작업에는 다소 직설적으로 보일 정도로 관념적인 존재에 관한 물음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스레 사진으로 이동하면서 화면의 구성이 다층적으로 바뀌고 팔레트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사진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앵글의 각이나 위치도 자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회화에 대한 관념적 고민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변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자연스레 인물과 풍경을 주목한다. 흥미로운 점은 회화와 사진에서 얼굴의 상부를 의도적으로 잘라내는 점이다. 시선이 사라진 인물은 개인성을 지우고 익명성을 강조하기 위한 선택이지만 사진의 경우 이러한 구도는 시선의 상실에 의해 오히려 몸과 옷차림에 의해 대상을 파악하도록 유도하게 만들었다. 이민호의 풍경 사진은 피토레스크(pittoresque, 전경 또는 경치)의 개념보다 풍경의 파편들의 콜라주라 부를 수 있다. 전체가 아닌 부분, 거대서사가 아닌 풍경 또는 장소의 일부 단서들을 재구성하는 방식은 가장 작은 풍경이라 할 수 있는 텃밭의 일부와 자신의 작업실, 여행 중 묵은 호텔방, 우연히 발견한 버려진 건물의 실내외의 일부를 자르고 붙이는 과정으로 만들어진다. 사진 속 풍경의 콜라주는 장소의 정체성을 탈영토화한다. 조각난 풍경들은 다양한 장소를 지시하는 단서들이자 풍경 개념의 질료로 볼 수 있다. 이 질료들은 원래의 문맥에서 벗어나 또 다른 장소로부터 탈주한 풍경들과 접속한다. 이전의 시간이 이후의 시간과 만나고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기억과 얽히면서 이민호의 사진은 불가능한 현실, 시간과 기억의 지층을 변위(displaced)한 리토르넬로를 생성한다. 이번 전시 <그렇게 끝없이, 미로-아리아드네의 실>은 그녀가 그 동안 찍었던 사진의 주변에 자주 배경처럼 등장하던 공장, 공장굴뚝, 굴뚝의 연기를 대지와 공기,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제시한다. 이전의 시간에서 찾은 공통의 단서 속에 실타래라는 새로운 기호가 삽입된다. 끊임없는 운동을 통해 에너지와 산물을 생산하는 공장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는 사회학자나 환경주의자에게는 비판의 대상이겠지만 시인의 눈으로는 매일매일 똑 같은 일상을 반복해야만 하는 생존의 동력이자 삶의 조건으로 비추어질 것이다. 생명과 인연을 상징하는 실타래는 마치 운명의 신비라도 풀려는 듯 청회색 공기와 꿈틀대는 잿빛 연기 사이에서 길을 인도하는 듯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표들에 대한 확장된 해석이나 신비주의적 의미론이라기보다 작가가 펼친 시간과 기억으로 배치된 패치워크를 어떻게 구성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사진 콜라주라는 리토르넬로

탈영토화된 여러 시간과 기억은 사진 콜라주 화면 안에서 재영토화된다. 그것이 특별한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특정 주제를 시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떻게 실재로부터 추출한 시각적 단서들이 화면 안에 재영토화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민호의 사진 속 이미지들-기억들-시간들은 저마다 다른 문맥에서 발췌된 것들로 구성된 세계이다. 사실 포토샵으로 원 이미지를 자르고 재접합해 의외의 대상이나 장소를 만드는 건 동시대 ‘조형적’ 사진의 특성이다. 이러한 조형적 사진은 일반적으로 실재보다도 더 실제적인 가상세계를 재현하고자 한다. 실재와 가상의 모호한 경계로 만들어진 세계의 시각적 스펙터클은 회화에 대한 동시대 사진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사진은 오랫동안 그리고 여전히 회화와의 대결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회화에서 사진으로 탈주한 이민호의 경우는 이러한 주체적 예술 매체라는 쟁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듯하다. 작가는 완벽한 가상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진이란 기술을 이용해 회화적 태도를 연장하는 데 집중한다고 덧붙인다. 이는 회화와 사진 간의 오랜 경쟁과는 사뭇 다른 접근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사진으로 회화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다.

 

오히려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자. 회화란 캔버스와 물감을 사용해 창작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구상과 추상의 차이를 거론하지 않고 회화의 조건이란 단순히 질료적인 것만으로 충족될 수 있는가? 사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진기로 촬영을 하고 인쇄를 한다고 해서 사진의 개념을 충족하는가? 일련의 질문은 철학적 사유를 요구한다.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행위는 창작의 형태를 분류하는 기본이지만, 사실 회화적 사유, 사진적 사유라는 차원으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단순히 매체만의 속성으로 구분할 수만은 없는 게 아닐까? 베허 부부의 사진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조각상을 받고 로버트 롱고의 몸부림치는 인물 사진이 조각의 차원을 사진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예를 생각해보자. 볼프강 틸만이 사진을 찍지 않고 인화지와 빛의 관계만으로 미니멀 회화와 유사한 결과를 유도한 실험도 떠올려보자. 매체는 하나의 도구일 뿐 더 이상 결정적인 분류법으로 수렴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민호의 사진 역시 회화적 사유를 사진 매체로 탈영토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아니라 사진의 파편들을 모아 화면 안에 재구성하여 완벽한 가상세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진의 세계가 익명적인 장소들과 개인적인 삶의 편린으로 배치된 이질적 시공간과 기억으로 채워 새롭게 만들어낸 리토르넬로(반복구)가 아닌가. 그것은 초현실주의 회화가 이질적인 요소들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 것과 달리 이질적인 요소들이 저마다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즉 회화에서 사진으로 탈영화를 감행한 이유가 단순히 매체를 바꾸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리듬, 강도에 맞는 질료를 선택했다는 표현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기억이 자신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모리스 블랑쇼의 문장은 기억이 절대로 스스로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기억의 리토르넬로가 노래로 들리는 경우는 아마도 의도치 않은 사건의 등장으로 촉발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이민호는 자신의 앨범을 뒤적거리면서 우연히 기억을 끄집어 낼 것이다. 일상의 무료함과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텃밭의 식물에 시선과 여행 중에 찾아간 빈 집이 주는 의아함 그리고 의도와 상관없이 찍힌 주변의 배경들을. 반복적으로 재배치되어 화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요소들(창작의 원소들)은 되돌아오는 후렴구처럼 작업 전반에 나타난다. « 리토르넬로라는 개념을 통해서 삶을 살아가는 시간이 선형적이고 무료한 반복이 아니라, 각각 서로 다른 존재의 다채로운 화음이 서로 어우러지는 것 »을 알 수 있다고 철학자 신승철은 말한다(식탁 위의 철학, 동녘, 2012, 16쪽). 그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언캐니한 세계 속에 자신의 영토를 만드는 행위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익숙한 일상의 재료들로 새로운 영토를 되풀이해서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What I Remember Does not Come from Me

 

                                                                                                                           By Jung Hyun, Art Critic

 

               “I did not remember myself, that which did remember did not come from me.”

                                                -Awaiting, Oblivion (L'Attentel'oubli) by Maurice Blanchot

 

               "I want to understand me, enlighten me, make known me, get me hugged, and someone to take me."

                                                         - A Lover’s Discourse: Fragments by Roland Barthes

 

 

 

We are well aware that creation is derived from life. Life is the forum of force majeure where all is not done as we have planned. Artistic creation is not a mere action of producing images but the moment of one’s will to endeavor some introspection or a time of elemental agony. Roland Barthes explains that we just unveil images and cannot reach a true work of reflectivity through a feeling of love. One who falls in love wants to introspect something through love but he or she seems to  always fail. One who falls in love is one who gleans images representing memories. A way Barthes observes love is similar to that of love. The theme to which an artist pays attention is found at the center of the scene but we display our concern to something captured in its periphery. Is life that we take note of objects that have nothing to do with us while wandering the periphery?

 

As such, Lee Minho’s photographs derive from the surroundings she wanders. To the artist, a photograph is the background of her life, an element of all creation, a record of the place where she stays and the landscape she sees: “a symbol of her memory.” The elements of memories accumulated are rearranged in her photographic scenes, unfurling another world. “Portable landscape,” a principal concept of her art is not an image stemming from one-off fragments of memories but an imaginary scene created through an interweave of her everyday scenes and the images of places she discovered by chance on her journey.

 

 

 Photographic deterritorialization

 

Lee Minho is known as a photographer in Korea but she worked as a painter when studying in Paris. Unlike her photographs, Lee’s paintings aroused a rather gloomy, heavy atmosphere, applied with achromatic colors. Lee made a turnaround from painting to photography in the late 1990s, while changing her work’s atmosphere considerably. In her painting work she was consistently absorbed in rather blunt questions concerning ideal existence. After naturally changing her primary medium to photography however, her work’s composition appears multilayered and her palette becomes diversified. As she did not take any formal photography education, her option of angles and locations is not confined by any regulation. While capturing her surroundings, escaping from any ideal consideration of painting, Lee has naturally put focus on figures and landscapes. Interesting is her intentional cutting of the upper parts of faces in her paintings and photographs. This is to get rid of a figure’s individuality and instead emphasize anonymity, but in her photography this composition allows viewers to grasp photographic subjects by their bodies or clothing.

 

Lee’s landscape photographs are not defined by the concept of “pittoresque” but can be referred to as collages of the fragments of landscapes. Her way of recomposing part not whole or some parts of an entire scene is like a process of cutting and putting together parts of the scenes of her studio, a hotel room where she stayed, and the indoor of an abandoned building.

 

Her collages of landscapes in her photographs deterritorialize a place’s identity. The landscapes broken into pieces can be seen as clues to diverse places or materials for the concept of landscapes. These materials are connected to other landscapes running away to other places, escaping from their original context. As previous time meets posterior time, and past memories are interwoven with present memories, Lee’s photographs form ritornelli by displacing impossible realities and layering time and memory. In this exhibition So Endlessly, the Labyrinth-Ariadne’s Thread, Lee presents factories, factory chimneys and the emitted smoke she has often featured as the backgrounds of her photos as the mediums of the earth, air, and the sky.

 

A skein of thread is inserted into the common clue she discovered in previous time. The smoke puffed out from the chimney of a factory that turns out energy and products through its incessant movements is an object of criticism by sociologists or environmentalists but may be seen as the motive power for survival or the condition of life by poets. The skein of thread standing for life and connection seems to guide us somewhere between bluish gray air and wriggling ash-colored smoke. What’s significant is not any expanded interpretation of the signifiers or any mystical semantics, but to examine how the artist has constructed a patchwork of unfolded time and memory.

 

 

 Ritornelli of photo collage

 

Deterritorialized time and memory are reterritorialized within a photo collage scene. This does not generate any new memory or intimate any specific theme. Rather noteworthy is how visual clues elicited from reality are reterritorialized in the scene. Lee’s images, memories, and times in her photographs are of a world composed of things taken out from different contexts. One of the hallmarks of “formative” photographs of our time is to create unexpected objects or places by digitally processing original images such as cutting and recombining them with Photoshop. Photographs today intend to represent an imaginary world that is more realistic than the real in such “formative” photographs. Visual spectacles in the world where the vague boundaries between reality and imagination become blurred seem to claim the possibilities of photography over painting. In fact, photography has long vied with painting. In contrast, Lee Minho seems comparatively free from the debate on such subjective medium of art as a painter-turn-photographer. She does not make any effort to create a complete imaginary world. Rather, she seems to expand her pictorial attitude by using photographic technique. This is an approach indifferent to a long-standing competition between painting and photography. And yet, it cannot be interpreted that she does painting with photography.

 

We can pose questions such as “Does painting mean to create something with canvas and paint?” and “Can we meet the requirements of painting simply with something material without mentioning any different between figuration and abstraction?” So does time. Is taking photos with a camera and printing them to meet the requirements of photography? These questions demand our philosophical thought. An act of painting and photographing are the fundamentals of creation. If considering them in the dimensions of pictorial or photographic thoughts, such acts cannot be distinguished only with the attributes of mediums. Examples are Bernd and Hilla Becher who won a sculpture prize at the Venice Biennale, Robert Longo who tried to interpret the dimension of sculpture photographically with his figure photographs featuring writhing persons, and Wolfgang Tillmans who attained the results of his experiments similar to minimalist painting only with the relation between printing paper and light.

 

A medium is nothing but a device, not depending on any classification system. If so, Lee’s photographs can be interpreted as a deterritorialization of the medium of photography anchored in pictorial thought. Her works are not a perfect imaginary world created through the gleaning and reconstruction of photographic fragments but the ritornelli filled with her memories in the heterogeneous space-time arranged with fragments of anonymous places and individual life.  Unlike Surrealist paintings in which heterogeneous elements form the world, such factors can be interpreted as the means to reveal each existence in her work. That is, we can more properly explain that she has endeavored to deterritorialize her art from painting to photography to approach closer to herself with the materials such as rhythm and intensity.

 

We understand what Blanchot said, “I did not remember myself, that which did remember did not come from me.” as that memories in no way speak to us. The ritornelli of memories that sound like a song are perhaps stimulated by the emergence of unintended events. Lee may draw out her chance memories from her photo albums. The elements (elements of creation) that are rearranged repetitively, such as plants that help her overcome the boredom and solitude in life, curiosity about an empty house she met on her journey, and backgrounds captured by chance appear in her oeuvre like a recurring song. Philosopher Shin Seung-cheol alludes that “We can realize that the time of our lives is not linear, tedious, and repetitive but a good mix of diverse harmonies from different beings through the concept of ritornelli.” This is an act of occupying her own territory in an uncanny world we are familiar yet appear unfamiliar as if a child acquires a territory repetitively with familiar everyday materials.

 

 

 

                                                            그렇게 끝없이, 미로_아리아드네의 실

                                                                                                                                        최연하(사진비평)

 

그간 현대(인)의 초상(풍경)을 탐구하며 경계구역 너머로의 새로운 이동을 해 온 이민호에게 해독과 길 찾기가 불가한 미로가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 정주보다 유목의 단막들을 작품의 소재이자 배경으로 이어 온 작가의 작업여정은 이번 전시에서 ‘미로’에 이르게 된다. 작가의 이전 작업들이 존재의 증명과 부재의 풍경을 표상해왔다면, 신작 <그렇게 끝없이, 미로_아리아드네의 실>에서는 ‘그렇게’ 떠도는 운명의 흔적들로 도저하다. 인간 노마드가 남긴, 이제는 폐허가 된 공장의 건축물과, 쓸모를 다한 박물관의 내부, 건설 도중에 폐기 된 리조트와 버려진 수영장, 통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지하도가 날라 갈 듯 푸르스름하게 자취하고 있고, 작가는 그곳에 명주실타래를 뭉치거나 꼰 채로 공간과의 삼투를 시도한다. 익명의 공간에서 구체적인 사물과의 초(비)현실적인 결합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우연히 봉착한 미로에서 필연의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가면 잠시라도 정주할 수 있는 휴식의 장소-오아시스에 도달할 수 있을까.

 

열락의 신 디오니소스의 아내이자, 영웅 테세우스에게 미궁을 빠져 나올 수 있도록 실타래를 건네준 여인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는 오아시스를 희구하는 현대인들에게 눈멈(재현할 수 없음)과 봄(인식)을 동시에 제안한다. 이 둘은 이항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로에 닿은 자는 분명 길을 잃은 자이고, 그 때 비로소 길 찾기를 위한 아리아드네의 실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즉 우연인 것 같지만 필연적으로 곳곳을 헤매야만, 우연처럼 아리아드네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연모했던 테세우스와 헤어져 낙소스 섬에서 디오니소스를 만나게 된 것은 아리아드네에게는 우연이었겠지만, 목표가 분명했던 테세우스의 갇힌 영토보다, 가는 곳 마다 축제의 장(場)이 열리고 아름다움을 향유할 줄 알았던 디오니소스와의 만남은 우연을 은폐한 필연이었을 것이다. 노마드의 이야기는 단순한 길트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헤매면서 모험하고 목적 없이 이동하는 흔적들에 다름 아니다. 이번에 전시 될 작품 타이틀 중, ‘빨간 실(Fil rouge)’에 ‘길잡이’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길을 잃는다’는 것은 ‘길을 찾는다’와 동의어이다. 관성과 중력에서 벗어나 휴대용 박스에 풍경을 담아 끝없이 이동하던 이민호에게 아리아드네는 통일된 구조가 아닌 이질적이고 가변적인 장소에 실타래를 던져준다. 모든 예술가가 불확실성과 재현할 수 없는 두려움에 처하면서 낯선 미궁에 이르러서야 새로운 작품-흔적을 남기듯이. 하지만 오아시스는 잠시다. 풍요로운 영토는 정주하는 이에게는 획일적이고 동일한 아이덴티티를 부여하겠지만, 반쯤 뜬 눈으로 다른 삶과 사유를 더듬는 노마드에게는 곳곳이 미궁일 터.

 

그러한 의미에서 현대인의 정주지에 출몰하는 더는 유용하지 않은 공간(장소성을 잃어버린)들이 이민호의 작업에서 오아시스처럼 배치된 것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이 장소들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마크 오제의 ‘비-장소’를 연상하게 하는데, 현대의 문명 속에서 분명히 실제 하는 장소로 존재해 왔지만 역사에서 밀려났거나, 버려진 채로 지금은 장소 밖에 존재하는 특이하고 실체도 분명치 않은 공간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정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변주될 수 있는 실제 하는 가상의 공간/장소들이기도 하다. 공간의 고유성은 결여되고 실체감도 상실한 가상의 공간, 지금 있지만 아무데도 없는(now here, no where)곳. 여기에 신화의 상징소인 실타래를 엮어 놓음으로써 한 때 분명히 장소로서의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익명의 공간이 되어버린 현대의 미궁을 가시화하고 있다. 유목하는 여행자, 이민호 앞에 열린 풍경은 ‘그렇게…끝없이…끝없이…’이어지는 공간들일 뿐이다. ‘굴뚝1,2,3’의 쓰레기 소각장에서 무섭고 기이하게 끊임없이 올라오는 연기처럼, 그 연기가 하늘이라는 공간으로 수직상승하다가 옆으로 퍼지고 구름처럼 안개처럼 다양한 형상으로 와해되고 무상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불가지한 삶의 풍경들, 역사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장소의 기념비적인 특성이 무화되면서 자기 자신을 스쳐 지나가듯 마주하는 ‘비-장소’는 이번 작품의 전경이자 후경이 된다. 뿌리 내릴 수 없는 유목민-작가는 계속되는 뿌리 뽑힘을 운명으로 길트기를 시도하고,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 언제나 출구를 향해 나아가지만, 언제나! 해결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인다. 현대인의 정체성과 익명성을 작업의 아리아드네 실로 삼아온 작가에게 정주와 표류가 ‘봄’과 ‘눈멈’처럼 동체이듯이, 사진적 핍진성과 가상의 여행이 부딪히는 몽환의 여정에 주목하게 된다.

 

 

            미로_아리아드네의 실

        

                                                                                                                                                                        이민호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다시 실타래의 형태로 내려와 공간에 머문다.   삶에서 나온 부산물이 자연의 순환에 연결되어 가장자리에 머물다 다시 삶의 공간 하지만 시작과 끝의 경계가 모호한 장소로 돌아오는 순환의 고리를 얘기한다. 실타래가 의미하는 끝없이 이어지는 미로_물질적, 정신적 미로_가 삶의 주변을 무심한 듯 부유하며 주위를 환기시키는 장면이다.

 

나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정체성, 익명성에 관한 얘기이다. 이번 사진작업 시리즈에서는 그리스신화의 “아리아드네의 실”로 정신적 미로와 그 장소의 무한반복 속에서의 길. 즉 정체성을 잃은 현재 우리의 정신들을 투영해 보았다. 미로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자체가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모호함' 이 지배하는 장소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출구 찾기 자체가 삶의 중심적인 관건이라면, 삶은 그 불가능해 보이는 출구를 찾는데 바쳐질 수밖에 없다. 익숙한 듯 현실에 널려 있는 사물들과 폐쇄된 공간으로부터 벗어나 출구를 향해 나아가며 외부와의 소통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장소와 시간을 전혀 암시하지 않는 공기와 빛, 소리들이 만드는 이름 없는 풍경, 정교하고도 광택 나는 거리감으로 이루어진 익명으로 연결되는 지점과 분리의 지점을 얘기하려한다.  미로는 한 번 들어가면 길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공간이다. 그 속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지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 채 모험을 떠나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미로는 삶의 여정에 비유된다. 언제 미로에 뛰어들었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우리는 지도 한 장 없이 그 속을 헤맨다. “당신의 미로에 있는 세 개의 선은 너무 많아. 나는 단 하나의 직선으로 된 그리스의 어느 미로에 대해 알고 있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 직선 속에서 길을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라고 보르헤스가 그의 소설에서 묘사했던 시간과 공간의 미로, 눈으로 보는 실제형태의 미로가 아닌 정신적 의미로의 미로를 무한 반복적이지만 미묘하게 변형된 형태로 시각적으로 재현하려 하는 것이 이번 작업의 주제이다. 미로에 대한 얘기를 하기에 적합한 사물들 중의 하나인 실 뭉치들. 아직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재료에 불과한, 어떻게 또 어디로 연결 될지 모르는 시간과 공간에 의해 완전히 다르게 갖춰지게 될 물질로 나는 보았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정신의 회로, 삶의 가닥들로 환원시켜 보았다. 한 인간 개체 속의 무한 반복되는 생각들과 감정의 씨줄 날줄들이 잘 정돈되거나 엉겨있는 모습으로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모습이다.

 

일상에서 한 발자국을 밖으로 뻗으면 불안의 구멍에 빠질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과학혁명과 그에 따른 급격한 기후변화들, 또는 멀지 않았던 과거의 몇몇 생활패턴들을 완전히 잊고 이젠 일상에서 쓰게 된 첨단기기들을 받아들여 응용하며 살고 있는 지금, 공상과학 영화의 이미지들이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조차 불분명해지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주위풍경. _시간과 함께 어우러진 인공적 풍경들은 자연풍경과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 모호함이 좋다._ 그 속에 던져진 우리를 생각해 본다.

                                                                 Labyrinth_ Ariadne’s thread

                                                           

                                                                                                                                                                                          by  LEE Minho

 

Smoke coming from the chimney is a cloud ascended to heaven and then in the form of thread down repose in space. The by-products from the life is connected to the cycle of natural repose in the edge of our living space and again return to the place the boundary between the beginning and the end ambiguous. Endless maze_ physical and mental _ to Thread meant is floating around seemed indifferent to the scenes of life and to ventilate the area.

 

The theme through entire my work is talking about the identity _ anonymity. In this series of the photo work I try to say our sprit has lost identity at present through the labyrinth in Greek mythology, "Ariadne's thread" in the way of mental maze of endless repetition in its place. The labyrinth is a place where the possibilities and impossibilities itself opaque and uncertain 'ambiguity' dominance. It seems impossible to find the exit itself and we can only be offered seemingly impossible to find the exit.  I try to explain the Nameless landscape that does not imply at all places and times and sophisticated and polished also be made anonymously connected with distance.

 

The maze is a space that can not be seen entering the start and end of day one. I describe a maze of endless repetitive means to spiritual, but as a slightly modified form, not the actual form of labyrinth seeing eye. I think the thread is one of suitable thing to talk about the maze. It is not yet just the material lacks the type. I saw it as a material to be equipped completely differently by time and space where you do not know whether another connection and, the other hand, the circuit of the human spirit, seen by the reduction in the strands of life. I figured the images of the thoughts of Human individual inside the infinite repetition and his emotions arranged or tangled by the latitude and longitude is wandering from place to place.